부자들의 비밀- 부불삼대(富不三代) 2부
1부 내용은 아래에 있으니 클릭해서 확인해 주세요.
부자들의 비밀- 부불삼대(富不三代) 1부
부불삼대( 富不三代), 부자가 3대를 넘기기가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계 역사를 통틀어 300년 이상 부를 유지한 가문은 매우 드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도 200여
first.goldbitcoinzcash.com
1부 내용에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4.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
지금은 쌀이 넘쳐나지만, 조선시대에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쌀이 곧 재산이었고 부의 상징이었죠. 그리고 지금처럼 기술이 발달한 것도 아니니 일손이 많이 필요한 고된 노동이었고, 쌀 생산량도 턱없이 낮아서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흉년이 들어 굶어 죽을 정도의 위기 상황에 처하면 사람들이 궁여지책으로 논밭을 팔아 쌀을 사곤 했지요. 그런데 쌀이 귀해 논을 말도 안 되는 헐값에 넘기는 사례가 많았다고 합니다. 쌀이 넉넉한 부자 입장에서는 흉년이야말로 논을 헐값에 사들여 재산을 증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셈이죠.
하지만 최부잣집은 그것을 금했습니다. 논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끼니로 허덕이는 농민들을 두고 볼 수 없었고 그러면 또다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할 테니까요. 그 원한들이 최부잣집으로 향하는 것은 결코 이로울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죠. 그러고 나서 최부잣집은 논을 사지는 않지만 흉년으로 쌀이 필요한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곡식을 풀어 마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자기 집만 멀쩡하면 무엇하겠습니까? 옆 집이 초상이 나고 마을이 쑥대밭인데, 선비란 학식이 있으며 덕이 있어야 자신 또한 평안한 법이니까요. 이렇게 함으로써 마을에서 옆 마을로 입소문이 나서 최부잣집은 믿고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신뢰가 쌓이고 덕을 베푸니 백성들이 보은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5.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게 하라
무명옷은 고려말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들여와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널리 쓰이게 됐고, 목화로부터 얻어진 면으로 짠 직물을 말하는데, 땀과 수분을 잘 흡수하며 촉감이 좋고 실용적인 옷입니다. 이런 옷을 입게 한 연유는 아무래도 갓 결혼한 며느리가 집안 곳곳에서 적응하기 편하고 실용적인 옷을 입고 다니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비단옷 등 겉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다닌다면 배울게 많은 입장에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적응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편했을 터이고, 검소하고 겸손한 자세를 익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6가지 원칙 중 하나로 선정한 것으로 보아서 보통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잣집의 며느리로 들어가면 옷과 음식 등 풍족한 삶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석집 최 씨 집안의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고 백성들의 일반적인 삶을 겪어봐야 한다는 가르침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 무명옷을 얼마나 덧대고 기워 입으면 ' 3년 며느리 치마 한 벌을 솥에 넣어 삶으면 서말치 가마솥이 가득할 정도였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6.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백 리는 쉽게 말해 40 km이고, 사방 40 km이면 동쪽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이고 서쪽으로는 경산까지이며, 남쪽으로는 울산이고 북쪽으로는 포항까지를 말합니다. 말이 백 리이지 지금으로 치자면 경상북도의 1/3 정도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이처럼 최부잣집의 가훈은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는 애민사상과 인간애를 엿볼 수 있는 선비의 마음과 실천이었습니다. 자기 집안만을 생각하지 않고 다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운명 공동체라고 느낀 것이죠. 정말 대단하고 존경할 수밖에 없는 가훈이고 이것을 따르는 후손들도 본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경주 최 씨 중시조 최진립( 崔震立*1568~1636) 장군이 임진왜란이 터지자 25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동생 최계종과 경주 일대에 침입한 왜군을 화공으로 물리쳤고, 몇 년 뒤 정유재란에서는 권율 장군을 도와 서생포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또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때에는 환갑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남한산성에 임금이 포위당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임금께서 남한산성에 포위 당해 고초를 겪고 있는데 늙은 신하가 어찌 살기를 도모하겠는가'라며 주위의 만류에도 솔하의 하인들 몇몇을 이끌고 출정하였지만, 청나라 철기군 화살에 맞아 전사합니다.
여기서 주목을 끈 것은 그의 열혈 애국적 활약상도 있지만, 당시 철저한 신분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최 장군과 그의 후손들이 일반 사람들, 노비에게까지 드러낸 따뜻한 인간애를 엿볼 수 있어서입니다. 최 장군은 용인 험천 전투를 앞두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여정을 같이 한 노비'옥동'과 '기별'에게 "너희는 떠나라. 난 여기서 싸우다 죽을 터이니 가족들에게 그렇게 알려라"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노비들은 "주인이 충신의 길을 가는데 어찌 충노가 그 뒤를 따르지 않겠습니까"라며 함께 전사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최진립 장군의 후손들은 '충노불망비'를 세워 옥동과 기별의 충정을 기리고 매년 최 장군에 대한 제사를 지내면서 이들 충노들에 대한 추모제를 별도로 지낸다고 전해집니다. 노비를 위해 제사를 지낸다는 얘기는 처음이라 진정한 오블리스 오블리제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경주 최씨 가훈의 의미
이처럼 나라에 공헌하고 백성을 자기 집안사람처럼 대하는 최부잣집은 경주 사람들이 외출할 때 반드시 최부잣집 땅을 밟고 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왕족을 제외하면 아마도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가문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부정한 방법이 아닌 정당한 투자와 원칙, 적정한 이윤을 추구해 가며 돈을 벌었고, 가난한 자를 위한 구휼 사업도 남다르게 했다는 사실이죠.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최부잣집은 더 이상 만석집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라에 보탬이 되고자, 전 재산을 독립 자금과 공헌에 사용하였고 최 부잣집 후손들은 "만석꾼이란 말보다 연금 25만 원을 받는 독립 유공자 후손임이 자랑스럽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사실, 6가지 원칙은 부를 위한 가훈처럼 보이지만 후손들이 나라와 백성을 소중히 대할 것을 당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부정부패에 빠지지 말고 나라에, 이웃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기를 선조들은 바랬던 것이죠. 하지만, 사람 마음까지 얻어서 부와 행운이 자연스럽게 따라온 것이겠죠. 이상으로 내용 정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